진실에 대하여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이는 비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 현상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시대적 현상을 ‘포스트 트루스(Post-Truth)’라고 정의하는데,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포스트 트루스는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인 사실보다 개인적인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믿음이 세계를 지배하는 논리로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탈진실’이라고 번역되는 포스트 트루스를 직역하면 ‘진실 이후’이다. 이 말인즉슨 진실을 추구하던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아니라 진실을 자기 마음대로 말할 수 있다는 정신상태를 암시한다.

진실을 믿고 싶은 대로 믿는 태도는 가짜뉴스, 사기, 해킹과 ‘공모’하면서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리 매킨타이어(Lee McIntyre)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태도를 강하게 경계한다. 매킨타이어는 가짜뉴스와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대항’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검증하고 회의하는 태도를 견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술의 영역에서는 다른 차원의 논의가 가능하다. 예술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정신 상태가 필요하다. 수용자 중심으로 예술을 이해하고자 했던 미국의 분석철학자 켄달 L. 월튼(Kendall L. Walton)의 예술에 대한 접근법은 이를 뒷받침한다. 월튼은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감상자의 반응의 기제를 연구하는 것을 통해 구해져야만 한다고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적극적인 감상자는 스스로를 허구작품의 한 등장인물로 상상하며 자신만의 허구적 (fictional truth)을 발생시키는데, 월튼은 이러한 예술작품의 감상을 ‘믿는 체하기(make-believe) 게임’으로 간주할 것을 주장한다. 믿는 체하기 게임이란 어떤 실제 사물을 가지고 하는 일종의 상상하기로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게임에서 그 전형을 찾을 수 있다. 아이들은 나무 그루터기를 곰이라고 상상하고, 그 곰에 올라타거나 도망치는 놀이를 한다.

물론 월튼이 말하는 허구적 참은 현실 세계의 참과 구분된다. 오늘날의 현실인 포스트트루스에서 믿는 체하기 게임은 변형되어 ‘유사픽션’이라는 새로운 작업 경향으로 대두된다. 동시대 예술가들은 허구와 실재, 주관성과 객관성이 갈피없이 뒤섞이는 듯한 상황을 반영해 노골적으로 현실에 개입하여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뒤섞으며 관객을 믿게 만들기도, 장난스럽게 속이기도 한다.

《믿게 만들기 Make-Believe》는 믿는 체하기 게임으로의 초대이면서 탈진실의 매커니즘을 탐구한다. 참여작가 남소연구소와 문채원은 관객을 사용자로 상정하여 ‘믿음’을 만들어 내기도 의심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남소연구소는 특정한 가상공간에 임의의 질서 체계를 부여하고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대상을 형태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가상의 플랫폼인 ‘남소연구소’의 소장인 남소연은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사용자를 위한 아이템을 제작한다. 이번 전시에서 개인이 직면한 상황이나 상태에 관한 추상적인 의뢰서를 받아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있을 법한 도구를 제작한다. 아카이브 의뢰실을 배경으로 새롭게 선보이는 도구 세 점은 개인의 심리적 교착상태를 감각을 통해 해소하도록 돕는다. 따스한 감촉을 물리적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은 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도구, 유령처럼 맴도는 나쁜 기억이나 잔상을 얼려 녹일 수 있는 도구,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을 때 몸을 붕 뜰 수 있게 해주는 도구를 볼 수 있다. 전시가 끝난 후에 이 도구들은 남소연구소의 아카이브 의뢰실로 돌아가 데이터 소스가 된 의뢰서와 함께 보관될 예정이다. 전시장 가장 안쪽의 〈남소연구소 Site에서 데려온 공지판〉에 간단의뢰서와 수납함이 있다.

문채원은 확신과 성공을 제시하는 시스템에 대한 의심을 바탕으로 그것을 따르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낯설고 불확실한 지점들을 시각화한다. 그는 설명서나 안내책자의 이미지를 차용해 예측불가능한 결과를 보여주는 ‘의사 매뉴얼(pseudo manual)’을 제작한다. 진지하지만 어딘가 어설프고 웃긴 이미지를 재조합한 화면은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기보다는 언어적, 논리적 이해를 방해하고 일상의 예측 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을 농담조로 제시한다. 이번 전시에서 문채원은 사람들을 ‘시스템’에 편입시키는 매혹적인 이미지를 선보인다. 신작 〈무제 (작고 부드러운 무기로 자신을 공격하세요)〉은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미끼를 소재로 한다. 먹이를 흉내내는 미끼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대상을 꾀어내 폭력을 가하는 파괴성을 지닌다. 문채원의 확대된 미끼가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시작 아이템처럼 즐비해 있는데, 이는 마치 내가 선택할 무기가 나를 낚아서 위해를 끼칠 것 같은 두려움과 욕망을 동시에 불러 일으킨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일명 ‘회전문’은 관객이 직접 움직여 볼 수 있다. 남소연구소는 자신의 첫 번째 개인전 《남소연구소: 응접실 뒤쪽 회전문을 지나 심층보존실로 들어오시오》에서 데이터상에 존재했던 응접실과 심층보존실을 현실에 소환하면서 공간을 가벽이 아닌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규칙’으로 구분지었다. 이번 전시는 그 연장선으로 손잡이와 바퀴가 달린 (상상의) 회전문을 마련했다. 관객은 각자의 규칙을 생성하면서 회전문을 사용해볼 수 있다. 회전문에 매달린 문채원의 〈무제(도는 이를 위한 유용한 조언)〉(2023)은 관객이 ‘Life 길잡이’의 지시에 따를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스탯’을 늘어놓는다. 그럴듯한(plausible)한 내러티브와 진지한 농담을 생산하는 이들의 문법에 속고 빠져드는 과정은 이번 전시의 주된 실험이다. 의뭉스러움과 믿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위태로움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기획·글/ 임나영